내 블로그는 어떻게 운영되는가? 0.닉네임운영정책


1. 글쓰기 능력을 올리기위해 사진이나 그림첨부를 최대한 자제한다. 물론 주인장이 조증증세를 보일때는 가끔씩 격양되어 마구잡이로 올릴때도 있다. 그러나 글로서 소리와 그림과 사진과 현장을 대변하는 것이 궁극목적중 하나이므로 그림과 소리와 사진과 동영상의 업로드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2. 이 블로그 운영의 절대 원칙 중 하나는 포스팅에 대한 참여자들의 반론으로 포스팅의 부족한 면을 채운다는 것에 있다. 그런 것에 방해가 되는 찬성이나 문맥과 관련이 없는 무의미한 이모티콘으로 도배되어있거나, 푸념으로 들리는 한줄글등은 지워질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을 운운하는 것은 본 블로거가 귀찮아서 지우지 않는 경우가 많기때문이다.

3. 조롱을 빼면 남는게 없는 내용은 모두 삭제 대상이다.

4. 그러나 작성자에게 이글루스 답글기능을 이용하여 답글을 단 사람의 글은 지켜줄 수 없다. 어제 8시때까지만해도 자기 댓글 싹 지우고 증거인멸한 예는 없었는데, 자기글을 지키고 싶으면 가급적 답글보다는 댓글을 이용하기 바란다.

5. 본 블로거는 3교대 직장에서 주간전담직장으로 옮겼고, 이르면 오후 5시부터 컴퓨터를 키며 블로깅을 하는 시간은 주로 8시에서 10시반까지를 기준으로 한다. 물론 빡쳤을때에는 빡쳐서 잠못자느라  새벽까지 블로깅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직장 업무 중에 컴퓨터를 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업무는 업무고 포스팅은 포스팅이니까. 물론 머릿속에 잡념이 들끓는 경우는 머릿속에서 시뮬레이팅만한다. 그러니 저 시간대 이전이나 이후에 시비를 걸거나 너네들끼리 싸우는 것은 무척이나 무의미한 일이다. 싸울려면 내가 있을때 싸워라.

6. 하나의 아이피로 아이디를 바꾸어가며 댓글을 달지 마라. 이글루스 글관리란의 덧글관리기능으로 들어가면 덧글을 싸그리 지울수 있는 기능이 있고, 아이피도 나와있다. 비로그인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중인격 삼중인격 흉내내느라 자신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말고 심신을 수양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대적해주기 바란다.

내가 댓글을 삭제하는 기준 0.닉네임운영정책

2. 논지와 관련이 없는 걸로 지들끼리 싸울때.
3. 주장과 근거의 구조를 갖지 못한 문장일때.
4.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실없는 소리라고 판단될때.
5. 개념없는 일부 동성애자들로 인해 이 블로그의 내용들이 부실해지므로, 기존의 댓글들과 중복되는 의견이나 그게 그것인 인신공격은 모두 삭제할 생각.
6. 남의 일에는 신경끄라는 말 말고 남는게 없는 소리.
7. 비로그인이면서 닉네임이 '지나가다'로 끝나거나 그와 유사한 아이디의 글은 그 글의 정합성이나 논리와 관계없이 모두 삭제대상.

내 포스팅의 어둠과 반론들의 밝음.(때로는 이게 역전될때도 있다.)의 조화를 이루어야하므로..
필요하다면
계속 추가된다.




연락처를 적었었는데, 전화하는 놈이 지금까지 한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바꾸었는데, 모르고 이 공지사항을 고치지 않았다.

오지도 않을 전화 기다리기도 무의미하고 해서 전화나 메일을 원하는 사람에게만 개인적으로 알려주겠다. 왜냐 귀찮으니까.

요즘 어느당보고 선거철이라서 오바하느냐고 묻더라. 0.닉네임운영정책


오늘을 기해 이곳 호피지도는 새 포스팅이 없다.


새롭게 만들어질 블로그인

양피지애

tyruis2.egloos.com

에 다가 포스팅을 해야겠지.
블로그 만들면 이 포스팅에다가 다시 주소를 써넣겠다.

안녕, 게이들아, 안녕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적 학문적 소수자들아.
안녕, '학식은 있지만 벼슬은 없는' 찌질이들아.(그것도 요즘은 학식이라고 하는가보다??)


내가 댓글을 안단다고 통쾌함을 느낀다면 그건 너네들이 이상한거다.

일대일대응관계로 갯수비교하는 것에 관한 내 최종적인 결론은...


뻘짓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한 집합으로

여섯마리의 개와 여섯마리의 사람을 일대일대응한다고 했을때에,

이 두집합의 원소갯수를 일대일로 대응할수 있는 방법은 상상력이 닿는 만큼 있을 것이다. 36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을라나 모르겠는데... 6! 6펙토리얼이니까, 720가지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와 반대로 일대일 대응하지 않는 방법도 무궁무진하다. 아무거나 갖다대면 되니까 무궁무진하다.
일례로 들자면 멱집합을 들면 되쟎아. 예를 들어 개를 대응시키는데 개 안에 있는 미생물이나 찐드기, 이, 기타 잡스런 세균까지 다 대응시키면 여섯마리의 개로도 모든 무한집합에 대응시킬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삼각형안에 삼각형 하나를 더 그려놓고, 이 그림안에 있는 삼각형이 모두 몇개인가, 다섯개다. 뭐 이런식의 논지가 가능해지는것이다. 기준이 부실하니 그 빈틈일 이용해서 아무거나 갖다대면 그만이다.

개와 사람을 대응하는게 불편하다면 여자와 남자를 비교하는 것은 어떨까?

양쪽의 갯수를 비교하는데, 양쪽의 관계를 나타내는 방법론/수학으로 말하면 함수관계를 사용하는게 정말 제대로된 방법론일까?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방법은 상황은 여러가지다.
상황으로 싫은 이성을 선택하는것이 있을것이고, 좋은 이성을 선택하는 것이 있을것이며, 이것이외에도 여러가지 상황이 있을수 있다.

여자쪽에 레즈가 있다던가, 남자쪽에 게이가 있다던가 하면 이 대응관계도 이상하게 흘러갈것이다.
결국에는 무궁무진한 함수가 존재하겠지만 그 모든 함수들이 이 양쪽의 관계를 정확하게 일대일대응시키지는 않을것이다.
소매치기인 사람은 사람보다는 이성이 가진 악세사리나 돈을 갖고.... 사람은 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대일대응하는 함수보다 일대일대응하지 않는 함수가 훨씬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점은 생각하지 않고, 일대일대응하는 함수가 하나라도 존재하고 있으니, 이쪽은 같은 갯수를 갖고 있다던가, 이 함수로의 접근방법이 옳은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뭐, 이건 단순히 산수익힘책에 나오는 계산으로는 올바를지 몰라도
정작 이 계산이 적용되고 응용될 현실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것이다.(그리고 이것이 아마 수학이나 통계나 공식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공계과학자이나 기타 인문과학자들은 제대로된 공식을 산출하려고 그 고생을 하겠지.)

결국 갯수를 비교하는 방식에 일대일대응함수를 사용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게 내 결론이다.

그냥 집합론에서의 집합의 정의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는거다.

사람을 센다는데 사람이 아닌것을 집합에 넣는다면 그 사람아닌 것이 사람이라는 집합에 들어가야할 이유를 충실하게 대어야하고 그것이 남들에게 합의가 되어야한다.

그러므로 일대일대응 함수관계를 배제한 집합의 갯수비교에서 자연수와 실수는 어떻게든 일대일대응이 이루어질수 있다.
는 나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적을 받는다.

이 사람들이 하는 주장은 아마 유리수/무한순환소수에서 자릿수가 순환하는 모습을 보고 착안되는거 같다.

예를 들어 10을 3으로 나누면 3으로 끝도없이 이어진다.
하나의 1과 무한개의 0으로 이루어진 무한 서수를 3으로 나눈다면 사람들은 간단히 333...333만떠올릴수도 있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한다면,
333...333'.'333...333 이라는 밑도 끝도없는 수가 태어날수 있다는것도 알수 있을거다.(정수가 0을 중심으로 양극단을 오고가는 것처럼, 소수점을 중심으로 양극단이 확장되는 수라고 보면 된다.)
(물론 사람들은 333...333에 4를 곱하면 1의 자릿수가 2가 된다는 말은 안믿고, 3이라고만 이야기할 것이다. 333...333'.'333...333에 4를 곱했을때 그 수의 무한대쪽의 알레프가 1이 되리라는것은 모두가 찬성할 수 있어도 무한소쪽의 알레프가 2가 된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는 소리이다. 1333...3332라고 안하고 1333...333이라고 한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이런식의 발상은 칸토어의 일대일대응에서도 나타난다.

0과 1사이의 실수들을 자연수와 모조리 일대일 대응시켰을때에, 아직도 일대일대응시키지 못한 수가 대각선으로 나열되고 있다는 것이 칸토어 대각선논법의 요지이다.

어떤때에는 무한대의 끝을 상징하는 알레프라는 수를 집어넣을 수 있으면서, 어떤때에는 또 알레프라는 수를 상정하지 않는다.
무언가 일관성이 없다. 일관성이 성립하지 않는 차이점에 대한 설명도 부실하다.

칸토어의 대각선논법으로는 사실 실수가 자연수에 일대일대응을 하는지 알수없는 것이고(왜냐하면 누군가가 말하듯이 자연수의 n이 상징적인 수에 불과하다면 사실은 실질적으로 없는 수이고 따라서 n과 같은 알레프 또한 없는 수이기때문에, 대각선으로 성립되는 수가 이미 중복된 수인지 아닌지 알수가 없게된다.) 그렇다고 일대일대응하는지 안하는지도 알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무모순성이 성립하므로 칸토어의 방식이 제대로된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가끔있는데...

나는 어이가 없다.

이건 마치

니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지만, 범인인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때문에, 너 유죄!!

뭐 이런 식이다. 
저런식의 사고방식이 정말로 과학의 근간이 되는 수학적인 논증에서 나온 과학적인 방법이고 이것이 적용되는 수사법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떨런지. 요즘엔 이런것도 과학적인 수사법이라고 하고 과학적인 방법이며 제대로된 수학적인 논증이라고 하나보다.

내가 모르는게 있다면, 초등학교 수준으로 풀어서 이야기해라.
내가 초등학교 수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건 사실 일반인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찐따는 교양인 수준에 불과한거 아니냐고 ㅋㅋㅋ거리던데,
내가 교양인 수준으로서 알고 있어야할 한자 중에 하나를 대면 그걸 제대로 알고있을지 나는 의문스럽다.
그러므로 그나마 최저점인 초등학교 수준을 제시한다.

초등학교 수준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으면 이 글에 댓글을 안달면 된다. 아주간단한거다.

모르거나 할수없으면 안해도 된다.

그러나 어차피 안할거면서 지면낭비를 할거라면 내가 그거에 일일이 즉각적으로 답변해주기를 기대하지마라.

나, 요즘 누워지내느라 바빠서 이점은 참 미안하다.

왜 과학벨리에 그런 글을 올리냐고 어떤 찐다가 물었다.


그런 글을 안 올리면 과학벨리는 뭐하러 존재하는 것일까?

이게 제대로 된 방법론인지에 대해 찬반론을 만들어 토론의 장을 만들려고 하니,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니 꺼지라는 수준이다.

뭐 내가 오해한거라면...
상대방이 멍청해보이고 수준이 낮아보이면 그 수준에 맞게 이야기해야하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넌 이런 이야기 못알아듣지? 못알아들을꺼야. 알아듣고 싶으면 우리 단어들을 공부하던가.
아, 안들려 안들려. 너같이 수준낮은 애의 말은 하나도 안들려.
내 이야기를 못알아듣는 네 수준으로 내 수준높은 지식을 이해할리가 없지.
하고 끝나는게 여태까지의 너네들의 반응이다.

마치, 사람은 왜 하루에 밥을 두번 이상 먹어야 힘이 안떨어져요? 왜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나요? 같은 질문을 하면,
그런 당연한거에 과학이라는 거창한거까지 동원해야하느냐? 우리의 놀이터 공간을 낭비하지 말아라.
이러는 셈이다.

뭐, 너네들의 과학벨리라는게 과학을 빙자한 놀이터랑 자기과시에 불과하다면...(이거 생각해보면 야애니쳐보며 질질짜는 오타쿠들만큼 상당히 저질스러운거다.) 나는 그냥 데꿀멍하고 물러나야지.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고 소신을 말할수 있다면 좀더 다른 모습을 보여야할거다.

이를테면 직각삼각형의 세 변 중 두변의 길이를 알고 하나 변의 길이를 모를때, 이걸 어떻게 구하느냐?
단 제약조건으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나타내는 공식을 대입시키지 않는다. 라고 물었다 치자.

라고 물어보면, 피타고라스의 정리(라고 쓰고 너네들의 정리래봐야 '빗변의 제곱='어떤 변의 제곱'+'남은 변'의 제곱'이라는 공식딸랑 설명하는 걸로 끝나겠지.)없이 어떻게 저 문제를 푸냐고. 푸념이나 하는게 너네들의 현실이지.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그렇게 목매고 싶으면 이런 표현도 가능하다.

조상들이 건물들을 마구 짓다보니 발견한 공통점이 있다.
이를테면 정사각형의 밭 세개를 한 군데로 모아 삼각형을 만들었을때 그 삼각형이 직각삼각형이 된다면 가장 큰 밭의 넓이는 나머지 밭 두개를 합친 넓이와 같다. 이 사실관계를 역이용해서 변의 길이를 추적한다.
(서양의 피타고라스만 저런 귀납적인 현상에 주목한건 아니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건 피타고라스이니 편의상 피타고라스라고 할뿐이다. 그러니, 피타고라스의 저작권만 적절히 피해가면 그만인셈이다.)

뭐 이렇게 말하면 어차피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풀어쓴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물을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글과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과학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누구같은 찐따도 있을 수 있겠다.
그 찐따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과학을 논하는 자리에 공식따먹기나 하는 산수를 논하는건 취지에 안맞는다고.
어떻게 유구한 전통을 가진 것에 너같이 공부한지 얼마 안된애가 토를 달수 있느냐고.
(근데 전통이나 역사가 유구하면 그건 무조건 옳은건가? 예를 들어 매춘이나 살인이나 절도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면 이 세가지 행동은 무조건 옳은 행동일까?)

내가 말하는 분야는 수학일지는 몰라도 내가 말하는 본질은 수학이나 산수가 아니다.
과학을 과학답게 하는 논리나 사고방식에 대해 묻는것이다.
과학은 세상의 만물과 진리를 밝히는게 아니라 설명하는 학문이라고 누군가가 그러더라.
그러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통하여 어떤 현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면 그것이 국문학이든 음악이든간에 그건 과학이다.(예를 들어 음악수업에 음악샘이 피아노 연주를 가르치는데 이건 그냥 이렇게 쳐서 저렇게 치면 되는거야. 하고 끝나면 이건 과학이 아닌거고, 음악샘은 음악가이기 이전에 교육자이고 교육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쓰기때문에 과학이라고 할수있겠지.)

자, 그럼 이제 본심으로 들어가 물어봐야겠다.

과학벨리에는 어떤 글이 올라가야하는가.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네가 끄적이는 글은 솔직히 과학벨리에 올려져 남과 상호작용을 하기에 떳떳하며 충분한 글이라고 보는가???
내가볼때는 영 아닌거 같다.


내가 불만인건 너네들의 설명하는 방식이다.
곰곰히 살펴보고 책을 훑어보니 너네들이 설명하는 것도 뭔가 좀 아니더라.
너네들 교수님들한테 이런 수준의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하는게 맞는거냐고 한번 물어봐라.
(근데 암만 생각해봐도 과학벨리는 소수자들이나 노는 놀이터같은데, 나한테 단추가 잘못채워졌어요라고 물어볼 위치는 아닌거 같다. 예를 들어 찢어진 청바지나, 빈티지룩을 입는 사람보고 내가 "집이 가난하세요? 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세요?'라고 묻는 위치이고, 그럼 너네들은 '이건 과학자들의 패션이에요. 존중해주세요.'라고 대답하는 위치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이 포스팅은 왜 과학밸리에 올려져야하느냐고 묻는 찐따가 또 등장할 수 있겠다.

이건 과학벨리의 정체성을 묻는 포스팅이다.
정체성같은 방향설정도 안하고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주장할 생각이라면 과학에 인문학적 상상력은 필요가 없다던가, 과학에는 방향설정같은 거 안하고 심심풀이로 실험하고 해도 무조건 돈이 된다던가, 이걸로 먹고살만하므로 다른 학문에는 관심가질 필요가 없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해도 좋다.(물론 암묵적으로 너네들끼리 정한 정체성을 감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확인하려는 차원에서 묻는 질문이다. 솔직히 나는 내 예상이 틀렸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다.)

물론 그 말을 읽고 들을 나는 한심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런 너네들의 약한 모습을 보면서 내가 미처 발견못한 나의 약한 모습을 발견하여 우울해지는것도 뭐 나쁘지 않겠지.

137 세제곱 유타미터를 여친/남친들과 싸돌아다닌 후에도 시간이 남아돈다면 내 질문에 대답해보아라.


과학벨리에 들어가는 글에는 어떠한 소양이 갖추어져야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아라.

그간 일이 많아서 포스팅을 못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뭔가 놓친 것을 누군가가 지적할까봐 쫄아서 피곤하고 일많다는 핑계로 포스팅을 피한 것일수도 있다.


음...
기말고사도 끝나고 시간도 남지만 여전히 체력이 부족하고...

앞으로 또 업종을 바꾸면 체력은 커녕 시간마저 안남아서 돈만 벌게 될거같다.

그래서 미련이 남아 이 블로그에 다시 들어오니...

발전된 논조나 차별적인 논조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연수와 실수의 일대일대응을 말하기 위해 0과 1사이의 실수들을 자연수에 일대일 대응을 시키는 구조를 말하니.

무한소수에 해당하는 무한히 큰 자연수는 자연수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고 한다.

근데 내가 자연수-실수 일대일드립 한지는 몇년 되었는데 저런 대답을 이제서야 듣게 되어서 참 당황스럽고.
그걸떠나, 그 근거라고 나오는 것이 여전히 의문스럽다.

무한소수같이 생긴 자연수같이 생긴 무한히 큰 정수라고 해야할까..

0.333...333 - 333...333
0.999...9991 - 1999...999

이쪽 전공자들은 이런 수들을 무한서수라고 표현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무한서수는 자연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대응꼴은 잘못된 형식이다. 잘못된 형식으로 논지를 틀었으므로,
너의 주장은 틀렸고, 너의 주장이 틀렸기때문에??? 실수와 자연수는 일대일대응이 될수 없다.

뭐 이런식인거 같다.

뭐 무한서수는 둘째치고,

내가 이런 소리도 했던거 같은데.

기수를 갖다 붙일수 있다는건 어떤 무한집합이 기수에 일대일대응한다는 소리니까,
기수를 갖다붙힐수 있는 모든 무한집합들은 갯수가 같다 혹은 기수가 같다 뭐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실수와 그 부분집합인 '0과1'사이의 실수가 같은 기수를 갖고 있다는 소리는 실수와 그 부분집합이 각자 기수에 일대일 대응한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자연수또한 기수에 일대일대응이 된다.(아니면 차라리 자연수에서의 기수들은 무한집합인 기수에서 자연수를 위해 일부분 떼어준것에 불과한 것이니 기수의 모든 것이 자연수의 모든 것에 일대일대응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도 좋다. 이렇게 말하고보니 기수에 대한 무언가가 확장된 기분이군. 그러면 결국 세기위해 존재하는 기수자체를 셀수없다는 논리에도 도달하게 되는데 점점 복잡해진다.)

라고 물어보니 여기에 대해서는 대답이 없이 무한서수에만 집중한다.


무한서수가 자연수가 아님을 증명하는 공리로 페아노의 공리라는 게 있다고 한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고, 여기서는 내게 풀리지 않는 의문을 말하는 자리니까 주제에 충실해야겠지.


누군가가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있다.
자연수라는 집합에서 임의의 수를 꺼냈을때에 그 수가 아무리 큰 수라도 그 자릿수는 유한한 것이다.

그렇다면 임의의 수이며 자연수에서 가장 큰 수를 상징하는 n을 꺼낸다하여도 그 n은 유한한 자릿수를 갖고 있을것이고,
유한한 자릿수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결국 자연수가 유한집합이라는 것을 말하는 셈이다.

여친/남친이랑 137유타세제곱미터를 돌아다니며 놀러다닌 후에도 시간이 남는다면 자연수가 유한집합이라는 이 소리에 대해 반론해보아라.






(어느 누군가가 자연수의 특징으로 순서대로 나열할수 있다던가 어떻다든가 개소리를 한적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로 자연수라는것자체가 순서대로 나열하기위해 고안된 것이니까 주객이 전도되고 본말을 까먹은 발언이다.  너보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이 한 발언인데 못믿는거냐고 묻고싶거들랑 그 출처를 밝히는게 순서일것이다.
 지금 사람이 몇명이냐 라고 물어봤는데, 60킬로그램요~ 이런다던가, 사람 5명에 뼛조각 20개니까 27요~ 이런 소리는 하지 않을꺼아냐?)

(모든 자릿수가 9로 나열될수 있는 무한서수에 1을 더한다면 그 수는 어떻게 읽을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은 결국 무한서수들 사이에서의 대소비교가 무의미해지는 발언이 될수도 있겠다.)

도집합을 치니 위상수학이 튀어나온다.



뭐, 여유한 위상으로 가정하면 뭐 자연수의 도집합은 실수라던가,
뭐 어쩌구저쩌구 하면 자연수의 도집합이 공집합이 된다던가 라는 발언이 있는거 보면 도집합이라는 것은 매우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거 같은데....

내가 무한집합의 일대일대응에서 묻는 전체적인 맥락은,

정말 이 일대일대응이라는 방법론이 제대로된 비교법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대일대응이라는 방법론은 자로 들이대는듯한 절대적인 방법론이냐,
아니면 그때그때 고무줄 늘였다 줄였다하는 듯한 상대적인 방법론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수라는 무한히 큰 집합에 자연수가 아닌 임의의 원소, 너네들에게 친숙할 자연상수나 뭐 기타등등 어려워보이고 읊으면 똑똑해보일거 같은 수 하나를 추가시킨 임의의 집합을 하나 만들어도.

이 임의의 집합의 원소갯수는 자연수 집합의 원소갯수와 똑같은 갯수를 같게 된다.(이 개념을 어려워하니 너네들은 아마 갯수가 아니에염, 기수에염 이러겠지. 그런데 기수는 단순히 집합의 원소갯수만 나타나는게 아니더라? 비유하면 무심코 손가락을 한번 까닥이는 행동도 기수더라??)
정말로 극한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절대적으로 큰 임의의 수 n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임의의 수 'n+1'이 존재하는게 당연한거 아니냐?

무한히 큰 자연수는 그 다음수를 갖지 않는다는 어디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도 들리던데,
이런 논리 구조에 걸맞는 발언은 차라리 가장 큰 자연수는 그 다음수를 갖지 않는다고 말해야 맞는거 아닌가?
아무리 무한하게 크더라도 그것이 가장 큰 것이 아니라는게 아마 칸토어가 말하는 무한집합론 중 하나가 아니었나 나는 한번 생각해본다.

333...333 이 자연수의 극한 중 하나라고? 그래서 너네들이 하는 말은 뭐야? 333...333이 무한히 큰 수라 그 다음수가 없다(자연수에서 가장 큰 수다.)라고 하는 셈인데, 사실 333...333과 111...111이나 999...999의 크기가 크고작고는 무슨 상관이냐.
그냥 무한히 큰 수일뿐이지. 비교할수 없으니 취급할수 없는 수라고 끝내기에는 비교할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무튼, 내 주장은 일대일대응법은 상대적인 방법론이라서 비교의 방법으로는 별 쓸모가 없어보인다는거고,
이런 내 전체적인 맥락에 반대하는 너네들의 주장이 만드는 왜곡된 맥락은

'일대일 대응'법은 137유타제곱미터의 관측될수 있는 우리 우주안 에서 매우 절대적인 방법론이에요, 너따위 비전공자가 덤벼들수 있는게 아니니 똑똑한 어른들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줄 알고 찌그러지세염.

이거 밖에 안된다.

너네들의 답변이라는건 솔직히 도움되는게 하나도 없어서 너네들이 하는 공부래봐야 너네들의 인신공격에 열폭해서 그냥 내가 너네들의 댓글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현실적인 여건에서 그때그때의 단어들을 힌트삼아서 그때그때 시간남고 체력남아돌때 하는 거지,

너네들의 글을 읽고, 아아 그런거군요 하고 감탄해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말이다.

가르쳐준다는건 그런식으로 하는게 아니다.
뭐 너네들이 중고등학생 수능 과외해주는거라면 모르겠는데, 나는 시험치려하거나 수능준비하려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너네들의 방법론하고는 하나도 맞지가 않는다.

설명해줄수 없으면,

아 저는 댁같은 비전공자에게는 그런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해드릴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나는 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거다.
이렇게 말하면 끝나는걸 뭘 쓸데없는 사족을 그렇게 많이 넣는건지 나는 당최 모르겠다.
다른 일도 많을텐데 다른일 하지 뭣하러 시간낭비를 하지?


정말로 너네들에게 그런 진실된 선의와 성의가 있고 정말로 싸구려가 아닌 가르침을 내려주겠다는 결심이 선다면
너네들은 그런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내가 줏어들은 말에 이런 말이 있는데...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송충이에게
우와 너는 그 많은 다리를 어떻게 써서 쭉쭉 나아가니라고 물어보니
잘만 가던 그 송충이는

'아 내가 어떻게 이 많은 다리를 썼더라?'
하는 잡념에 빠져서 그냥 옆으로 자빠졌다더라.


아마 너네들은 어떤 방정식의 근이 네개라고 말하면 무조건 4차방정식으로 문제를 풀거같애.
아니 뭐 4차방정식으로 접근하는건 큰 문제가 아닌데, 너네들은 4차방정식으로 접근해서 안풀리면,
문제가 잘못된거 같아염, 뿌우. 나같이 지구인이 관측할 수 있는 137유타제곱미터내의 광활한 우주에서 통용될수 있는 심오한 논리를 공부하는 지성인에게 맞지 않는 문제인거 같아염. 뿌웅. 이러고 방구뀌는 소리하며 그냥 그걸로 끝낼거 같다.

어휴.

몇년전 1년정도 자식노릇할때..


아버지께서는 걸핏하면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컴퓨터가 이상하다 니가 와서 고쳐야겠다.(나 컴퓨터 좃도 모른다.)

뭐뭐해야겠는데 니가 와야겠다.

너 언제오냐?

이렇게 물었다.

일주일에 두세번정도 찾아갔단거 같은데 내가 더 찾아갔다면 안 지겨우셨을까?
형님내외가 찾아올때는 손녀(나한테는 조카)보는 맛빼며는 그리 반기지는 않는거 같고.
(아버지는 형님한테 무의식적으로 속죄해야겠다는 생각이신지도 모르겠는데 집사줄때 엄마몰래 돈보태줬다고 갈굼당하고...)

예전에 죽어라 공부안하는 학창시절의 나보고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으면 아버지 자존심생각해서라도 좀 해야하는거 아니냐? 너는 모기새끼같다. 내 피만 졸졸 빨아먹는.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부모님한테 뭐 사먹게 돈달라는 소리같은건 절대로 안하고, 가끔 학교에서 참고서 사게 돈달라고 하고, 학교에서 사라는 참고서나 내 취미생활을 위한 댓생서적을 사려할때에는 버스비 아껴모아서 그걸로 사고 급식비삥땅쳐서 그걸로 샀다. 그리고 그당시 500원하던 땅콩센드와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수능공부를 했다.)

이러면서 내가 아버지와 함께 거실에 있는것 자체를 싫어했는데.
(물론 내가 안보이면 공부하는줄 아는줄 아는건지도 모르고... 혹여 온다해도 내가 뭘 공부하는지 알기는 어려우실게다. 내가 학생이 아니게 되었을때, 내가 방문을 걸어닫고 거실에서 나오지를 않자 아버지는 화를 내며 왜 문을 닫느냐, 왜 문을 잠그느냐했다. 나는 내 개인시간과 개인공간이 소중했으므로 결국 부모님 집을 박차고나와 독립하게 된다.)

그러다 어떻게 내 전화번호가 흘러들었는지 몰라도
공부 지지리도 안하는 아버지가 문자로 '넌 내가 죽어서야 찾아올 생각이냐?'라고 물었었다.
나는 무심결에 찾아뵙겠다고 했었고 그 해 3월부터 아들노릇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돈 모을려고 떠나있는 몇년사이에 아버지와 막내의 불화는 깊어지고, 어머니하고도 그렇고(어머니는 하나님을 거부하더니 이제는 잡귀를 섬기는 점쟁이를 섬기는거 같다.)

집을 떠났던게 잘못이었을까 싶기도 했다.

근데 집을 안떠났어도 큰 차이는 없었을거 같다. 정말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난 희생양으로 살고싶지 않았고, 식구들이 나한테 죄책감같은 걸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죄책감을 풀어내기위한 방어기제들을 느끼는 것이 괴로웠다.
내 친구의 말마따나 나는 세상에서 내 식구들이 젤로 싫었다. 20살이 넘었는데도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 처지가 너무나 무능해보였다.



아무튼 이 모든게 나는 내 책임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행동을 고치면 이 모든 사고들이 해결될거라고 믿고싶지 않다.
그래야할만큼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도 고통을 짊어지고 싶지 않다.
내생각에 부모형제들도 이런생각이지 않을까 싶을때도 있다.
그리고 짊어지기 싫은 고통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네가 남아주어서 다행이야.' 따위의 말을 했다면 나는 더더욱 박탈감과 서글픔을 느끼면서도
가족들을 위해 내가 희생한다는 충만함과, 왜 희생양인 나를 존중해주지 않느냐는 분노를 토해냈을거 같다.

그 용한 점쟁이라는 년이 내 어머니보고 이런 소리를 하며 질질짰다던데.

' 이 불쌍한것. 아들이 셋이나 되는데 막내만 남고 모두 떠나겠구나.' 


우으으으
내 어린시절의 대부분은 듣기싫은 소리들만 들으며 자라왔고 나는 애써 그 소리들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살았던가 같다..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인생을 부정해왔다.
그러니 자신들이 걸어오면서 전수할수있는 노하우래봐야 그들이 가본적이 없는 그런 먼바다 꿈나라 이야기에 불과할뿐이다.
현실성이 없으니 내 인생의 비전으로 삼기에 뭣하고
그들이 감탄하는 거래봐야, 니까짓것들이 감탄하는 것이래봤자 얼마나 감탄스럽겠느냐며 내심 무시하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기를 반복했다.
그런 부모님들의 푸념섞인 공부해라라는 소리를 들을때마다 내가 느낀건...

내 삶이라는건 소중하지가 않다. 그리고 날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이 사람들또한 소중하지 않다.
나는 언젠가 내 소중한 것을 위해 날 속박하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세상밖으로 뛰쳐나갈것이다.
이런 마음이었다.
누구에게나 있다는 그 소중한 무언가가 나에게는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백큐라는 놈이 나보고 패배자라고 했는데, 사실 그말은 전혀 틀린게 아니다.
나는 패배한 개처럼 평생을 살아오며 가끔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내가 받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로도 하면 밥그릇을 빼앗기고 매맞은 개마냥 그렇게 살아왔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지금 니 생활이 고달프지만 노력하면 네가 원하는 삶을 살수 있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패배자같고 찌질해보일지언정 그건 진정한 너의 모습이 아니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혼자라도 나에게 '나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어야했는데,
나는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쪽팔려서 그러지를 못했다.

세상사람들이 나보고 쓰레기라고 하는데, 그리고 거기에 나도 동조를 하는데,
내가 소중하다는 것은 틀린 명제인데, 패배할줄 알면서 무의미하게 패배하러 달려가는건 무슨 헛짓거리란 말인가.

그당시 나에게 필요한건
뭘 공부해야 이 찌질한 가난과 속박과 번뇌에서 해방될수가 있느냐는거다.
근데 학창시절에 그렇게 공부를 잘했다는 너네들은 그렇지가 않쟎아.
학창시절에 공부했으면 어른이 되면 공부 안해도 된다면서 일끝마치면 집에서 티비나 보고 히히덕거리다가 술한병빨고 잠드는 인생들이 나는 너무나 가엽고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그런데 그런 삶이 대다수더라??)

부모님이 밀어주지 않아서 초등학교만 나왔다는 내 아버지라던가.
고등학교때 영어시험치면 영어책 본문을 외워서 기말고사 90넘게 받았다던 어머니라던가.


공부잘해서 돈잘벌어도 인생좃같이 살아서 패가망신하는 케이스들이 테레비에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데.
학창시절의 공부만 잘하면 무슨 소용인가.

나머지 인생공부들은 그냥 부딪히면서 본능으로 감으로 익히면 그만인가?

그런데 나는 그러기에는 인생공부의 천재도 아니고, 멍청이 팔푼이 반편이에 불과한데.
내가 멍청이고 팔푼이고 반편이 병신이라서 남보다 두배 네배 열여섯배로 노력해야한다면 무엇으로 어떤방향으로 노력해야하는지 어른들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학창시절의 공부로만 끝이다.

모르지 학창시절의 공부라도 잘했으면 뭐, 어떻게든 잘 살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에 느끼기로 학창시절의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인생공부로 잘먹고 잘살면서 학창시절공부 잘한 년놈들을 종업원으로 부리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이 꽤 많은 걸로 알고있는데,

이 모든 것을 둘째로 치더라도..
역시.
나는 어른들을 믿지 않았기때문에
설사 어른들이 나보고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 너이기때문에 우리는 널 사랑한다.' 이런 소리를 하여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들었을것이다.


부모님은 여전히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까 안기다리고 있을까?
난 돌아가야할까 안돌아가야할까?

내 동생이 제2의 닉네임이 되지말라는 법도 없고,
나 닉네임은 말로만 험악한 네티즌이지만
내 동생이 행동하는 닉네임이 되어버린다면 골치아플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악화될것같은 사태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부모님에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인생이 이렇게 된건 저 백큐같은 멍청이때문이야.
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치면 나는 멍청이들에게 농락당한 셈인데
이건 둘째쳐도 내 인생을 내가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고 한스러워서 안되겠으며,
그것조차 둘째쳐도 남탓만을 한다는 것은 남의 배려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건데,


이런 식으로는 문제해결이 안된다.
문제 해결을 하려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이세상 모든 부조리에는 다 나의 책임이다.
라는 마인드로 살아야할지도 모르겠다.


아... 이 망할놈의 강력한데다 유연하기까지한 방어기제.
좀더 쪽팔리는 발언을 해야 나는 좀더 순수하게 울수 있을까? 


정말로 눈물한방울 나오지 않는다.
가면하나 사서 먼 발치에서나마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다.
개판이면 죄송합니다하면서 달려가는거고
잘살고 있으면 다행이군요 하면서 영원토록 부모님을 뵙지 말아야지.

독선과 독단이라도 밀고 나가야할때가 있다. 슬기로운 생활


게다가 그 독선과 독단이 남에게 주는 피해가 극히 미미하다면 역시 밀고 나가야한다.

그런 독선과 독단을

패배할줄 알면서도 왜 끝까지 밀고나가야하냐며는.
독선과 독단에서 빠져나올줄 모르는 나같은 바보는 죽어야 낫기때문이다.

하지만 죽으면 안되쟎아? 그치?

수능친다는 년놈들이 독단에 빠져서 '썩은 세상에 곡학아세하는' 놈들의 논리에 따를수 없다면서
그네들의 손길을 모조리 뿌리친다면 역시 죽는길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죽으면 아무것도 이룰수가 없다.

나처럼 죽음에 조금쯤 수렴하는 뻘짓을 하다보며는
뭐, 내가 바보같은 독선으로 독단을 행했구나 하면서 부끄러워하면서 뭔가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근데 이게 시간이 참 오래걸린단말야.
게다가 이런 짓한다고 뭐 연봉이 오르거나 장래여친/남친의 얼굴이 업그레이드된다거나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의 독선과 독단은 나의 생사나 내 영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내가 받아들일수 없는 모든 것들에 내가 살아있는한 끝까지 궁금해하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예수의 제자중 토마스가 예수를 의심했다가 절대적인 신봉자가 된것처럼

나는 더 넓은 아량으로 세상을 끌어안을수 있을것이고 그럼으로서 나는 절대적인 행복에 도달할것이다.


근데 이것이 뭐 연봉이 오르거나 장래여친/남친의 얼굴이 업그레이드된다거나 여친/남친이 빠구리를 잘 뛰어준다거나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쟎아.

일단은 먹고살아야 더 나은 생각이 깃들지. 안그래?

그러니까 충분히 자라서 기반이 쌓일때까지는.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내면의 부조리가 쌓여서 임계점에 도달할때까지 계속 네 알겠습니다를 반복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순간 그 부조리들이 서로 충돌하며 부딪히는 순간.....
음...

아... 이 말은 마치 너도 나와같은 길을 걸어라, 나처럼 언젠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몇날몇일을 울어보아라.-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업그레이드시키고 개선시킨 닉네임의 길을 걸으라는 말이로군.

그러나.

일단은 잘먹고 잘살아야하지 않겠어?
목적과 상황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지. 아무리 독단과 독선을 부리고 싶어도, 너 자신의 입에 풀칠을 스스로 할수 없다면 아직 독단과 독선을 부릴 때가 아니다.  

그런 독단과 독선은 너만의 생각으로 너 혼자있을때 생각해보는걸로 충분하다.
(나 닉네임은 현실에서는 내 생각같은걸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저 듣고 비교할뿐이다. 내가 하는 소리는 오로지 남이 듣고싶어하는 소리밖에 없다.)

그 독단과 독선이 형평성과 정합성을 갖게되었을때에 배출해야지. 완성되지도 않은 것을 내놓으면 나처럼 무시당한다.


병신같지만 나는 내 글에 트랙백거는게 귀찮다.

http://tyruis.egloos.com/3234551
그래서 그런가 맥락이 끊어져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글을 제대로 읽는건지, 사람들이 쉽게 글을 읽으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가끔 고민이든다.


그런데 저 사상인지 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무한히 큰 자연수라는 말자체가 모순이라고 하는데,

정리해보면
자연수라는 것은 자신보다 큰 자연수가 무한하게 널려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한히 큰 자연수라는 말은 무한하게 크다는 말이므로 자신보다 큰 수가 있을수가 없다.

라고 한다.

아놔.

난 분명 자릿수가 3으로만 구성된 무한히 큰 자연수라고 말했는데.


나에게 일대일대응을 가르쳐준 모 스타라이트인가 하는 인간은 나보고 집합의 갯수에서는 크기가 중요한게 아니다.
농도가 중요한 것이다. 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므로 자연수의 존재가치가 대소비교에 달려있는 것인지는 둘째쳐도.(그러니까 대소비교를 할 수 없으면 그건 수라고 할 수 없다는 말도 될것이다. 그러면 수의 영역도 유한한 셈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그러지는 않을거 같은데.)
서로 다르다라는 것만 알수 있으면 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럼 좀더 세심하게 수정해볼까?

자릿수가 3으로만 무한하게 널려있는 자연수라고 하자.
이럼 어때?

나 자신에게 이기는 것이 제일 어렵다.



일주일 가깝게 리플에 대응안한 나 자신에게 일단 칭찬을 해야겠다.
(사실 그건 내 자제심이라기보다는 일하느라 피곤해서 컴퓨터 킬 시간이 없어서지만. 일단 리플다느라 현실을 부실하게 사는 일을 줄였으니까.)

사람들의 비웃음섞인 리플들을 읽으려니 속이 부글부글 끓고,

한편으로는

니들이 그렇게 잘 안다면 이정도는 알아서 해석해주어야하는거 아니냐고 외치고 싶기도 한데,
그런 드립이야말로 내가 가장 적대시하는 개념이니 이쯤에서 한발짝 물러서주어야겠지.


내가 읽어봐도 정리가 안된다.

애초에 서두를

'이것은 수학에서 말하는 일대일 대응에 관한 글이다.'라고 밝히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좋으려나???

0.333...333을 셀수없는 수라고 말한다면
대체 어디의 무엇을 셀수 없는 수라고 하는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자릿수를 셀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대일대응 시킬수 있는게 없다는 소리인지 말이다.

물론 나는 그 글 비중 대다수를 일대일대응에 두고 있었으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난 안일하게 사람들이.

알아서 일대일대응에 관한 글인걸로 알아주길 바랬지.

근데, 갑자기 무한 서수는 자연수가 아니다.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말이 암시하는 것은..

333...333이라는 자릿수가 3으로만 구성된 무한하게 큰 수는 자연수가 아니라 무한서수라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설사 무한소수인 0.333...333에 대응한다하여도 

그러나 무한서수에 대응하는 것이지 자연수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암시를 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내 글의 맥락을 읽고 이런 댓글을 다는건지는 모르겠는데,
맥락을 읽었으면서 못읽은척하는듯 싶기도 하고 아리송하다.

(곁가지로 자연수는 서수의 부분집합이다 따위의 말도 들었던거 같은데 이건 환청으로 치부하자. 부분집합이냐 아니냐따위는 나중에 다시한번 공부하기로 하자.)

잘 모르겠다.


무한서수가 자연수가 아니라는 말 이면에는 서수와 자연수가 일대일대응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숨어있는 셈이고 
역시 무한기수 또한 자연수가 아니라는 말도 될것이며 기수와 자연수는 일대일대응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숨어있다.
( 뒤집어 생각하면 '기수를 붙일 수 있는 모든 무한집합은 같은 갯수'라는 것도 암시한다.)
이 말은 역시 모든 자연수와 모든 기수가 일대일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암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기수는 기수가 아니냐고 말하는 내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렇게 인식할수밖에 없으니까.

누군가들의 말마따나 정말로 나를 포함한 비전공자들을 위한 새로운 정의로서 이야기를 했어야하는 것일까?

근데 새로운 정의는 대체 누구에게 새롭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처럼 자연수와 서수와 기수를 구분할줄 모르는 사람에게는(그러니까 자연수와 서수와 기수를 분별해야겠다거나 구분해야겠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 333...333이라는 무한히 큰 수가 자연수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정의란 역시 전공자들에게 새로운 이야기이겠지 나같은 비전공자에게는 새로운건지 안새로운건지는 분별이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무한히 큰 수라는게 단지 개념뿐인 수라서 무한히 큰 수에게는 그 다음수가 없다는 소리도 환청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그러면 333...333이라는 자릿수가 3으로만 된 무한히 큰 자연수의 다음수라고 해봐야 마지막 수가 4이고 나머지 자릿수는 3인 무한히 큰 자연수-양의정수라고 해도 간단하게 표현될 일이다.(씨발 그러면 간단하게 무한히 큰 수라고만 말하면 소숫점도 포함해야하는데 그러고 싶니? 내가 추출하고 싶은 것은 기수로서 써먹을만한 수니까 자연수의 형식을 갖고 있는 수에서 택해야지.)

무한히 큰 수라는게 단지 개념뿐인 수라며 일대일대응이 가능하겠느냐는듯한 소리는 결국 무한히 큰 수 사이의 분별이 무의미하다는 식으로도 들린다.(일대일대응을 하겠다는 것자체가 서로다른 집합간에 비교를 하여 짝을 짓겠다는 것이니까. 결국에는 분별이 필요하고 무한히 큰 자연수 사이에서도 서로 다름이 존재할것이고 순서가 존재할 것이다.)

내 댓글에 자신의 과학력을 뽐내는듯한 dancer라는 사람이나 중학교 고등학교 교재나 보고오라는 모 비로그인 유저라던가 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나는 왠지 화가 난다.

dancer라는 사람은 마치 자신의 허세로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듯한데,
그 사람이 말하는 과학적인 논리로 구성된 과학적인 글은 그냥 출처하나 밝히고, 옛 어르신이 이렇게 주장했으니 그냥 그런줄 알고 있으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믿지 않다니 지옥에 가고싶은 모양이군하!!! 하고 외치는거 같다.
그러면서 넷상의 용어로 말하면 '나에게 약을 팔려한다.'라고 할 수 있다.
137유타미터에 관측가능한 우리 우주내에서 통용되는 논리라니 나는 그 광오함에 반해버렸다. 정말로. 
나라면 그말을 내뱉고 쪽팔려서 몇날몇일 찝찝해서 일이 손에 안잡혔을텐데.
나는 과학적인 추론과 과학적인 논리와 과학적으로 구성된 글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공부해봐야겠다.
그리고 남이 생각한 과학적인 추론과 과학적인 논리와 과학적으로 구성한 글을 뚜룩 말하는 것은

(잘 말하는 것도 아닌 것은 둘째치자.) 

그 사람 고유의 생각이라기보다 표절이 아니었나 다시한번 생각해봐야겠다.

(학문의 세계에서 무슨놈의 표절타령이냐 같은 소리는 하지 않기 바란다.)

그나마 학구적으로 대처한다는 모 비로그인 유저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은 일대일대응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써먹는것인지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로서는 저 사람의 말을 해독할 능력이 없다고 해야할까?
그 이전에 나에게 모욕감을 주는 말로는 역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재의 집합론 파트를 읽고 대학교 서적을 공부하라는 것인데, 내가 알기로 집합론은 모든 수학의 기본인것처럼 묘사되지만 모든 수학을 골고루 알지 못하면 해결하기 어려운 학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집합론, 그중에서 내가 가장 관심있는 화두-분별을 다루는 '일대일대응'파트는 그냥 흘러가듯 나올뿐이고, 단순히 계산을 잘하느냐 말을 잘알아듣느냐같은 아이큐테스트같은 마치 사냥감쫓는 듯한 서양기호들의 틈에서 기초도 부족한 내가 무얼 알수 있다는 것인가.

칸토어의 대각선논법을 대체할만한 논리-공리가 있다는 소리도 들리던데 그런 소리를 내가 들어본적이 없어서 이건 따로 생각해볼 문제이고...

그나마 알고있는
칸토어의 대각선논법을 따져보면. 
칸토어의 대각선논법의 요체는 0과 1 사이의 실수를 어떤식으로 나열하든 기존의 수열에서
중복되지 않으면서 기존의 수열에서 지적하지 못하는 새로운 대응꼴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각선논법에는 유한소수가 포함되지 않는 문제가 있고, 모든 유한소수를 무한소수 취급해서

예를 들면 0.2를 0.1999...999로 표현한다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어떤 식으로 나열하든 중복된 값이 나오지 않는다고 가정할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복된 값이 나오도록 조절하면 간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실수인 0.999...999가 여러개의 자연수에 무한히 대응하는 꼴을 무한히 나오도록 조절할수도 있다.

저게 좀 구차해보이면
0.1
다음에
0.12를 놓는다면
대각선 논법상에 0.12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내가 대각선 논법을 제대로 알고있는 것이라면 모르되 이게 아니다 싶으면 바로 지적바란다.


아, 내가 알고싶은 핵심을 요약해야지.

1. 자연수와 기수와 서수는 일대일대응하는가?
2. 과학적인 추론끝에 과학적인 검증을 하여 과학적인 논리를 펼치는 글에는 언어영역적인 표현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고 수학이나 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가?
3. 내가 대각선논법에 대해 제대로 지적하고 있는 것인가?

고졸사원 뽑는다면서 수능점수 본다는 회사가 있다.


난 아주 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조건 존경스러운 것이 아닌것처럼,

단순히 고등학교 3년 뚜룩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채용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능력을 판단할 근거도 없이 사람을 뽑아서는 안되며 수능점수가 그렇다면 사실 그 기업자체적으로 ssat같은 검사를 실시하는게 옳다고 본다.

최소한 공장 내의 기계나 문서작성이나 회계적 지식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이 사람을 데리고 빨리 업무교육을 시켜 빨리 업무를 봐야할것이 아닌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구성원의 행복에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회사는 존재가치가 없다.
그리고 업무를 진행하지 못하고 지연되는 회사에서는 이윤이 창출될수 없다.

대학은 안가도 수학점수가 높다면 그것만큼 고등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대학에서 쓸데없는 공부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회사에 특화된 것을 하루라도 더 빨리 교육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능점수 본다고 뿌우~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내가 사장이래도 수능점수 300점도 안되는 잉여 대졸자들을 뽑느니 300점 넘는 고졸자들을 뽑아서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시키고 잘라버리고를 할 것같다.

나는 이걸 아주 좋은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내가 알기로 사람인이라는 리쿠르트사이트에서 평균연봉이 제일높은 곳이 대우조선해양이라는 회사인걸로 아는데,
요즘 이 대우조선해양이라는 곳이 고졸사원을 뽑는다고 가슴두근거리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아.. 난 출근전에 잠좀 자야겠다.

무한히 큰 자연수는 그 다음수를 갖지 않는다고 한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나같으면 그냥 오오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다.
(왜냐하면 내 개인적인 주관에 따르면 셀수없는 자연수는 무의미한 수니까 자연히 쓸수 없는 수이고 그러므로 자연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며, 실질적으로 우리가 쓰는 자연수에는 한계가 있기때문에 자연수는 유한집합이라고도 생각한다.)


근데 이게 페아노인지 피아노인지 하는 학자가 뭐 공리계같은 것을 만들어서 증명한 것이라서
학계에서는 아주 뚜렷하고 확고하게 굳어진것이므로 1+1이 2인것처럼 확고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1+1=2를 설명하는데에 굳이 출처가 필요하느냐, 니가 말하는 것이 그렇게 고급수학적인 것이느냐를 물어보는거같다.

글쎄.

내가 알고있는 중학교 수준의 지식에 따르면 자연수는 무한집합이다.
무한집합이라는 것은 갯수를 셀수없다는 것이고(그리고 칸토어는 아무리 많은 갯수를 가졌더라도 일대일로 쌍을 지을수 있으면 갯수가 같을 것이라는 입장에서 무한집합의 갯수를 비교해내간다. 그래봐야 하나이상 많을것이다라는 소리이니 차별적이라고 할수는 없다.)

자연수의 속성중 하나인 서수적인 속성을 생각해보면
자연수 1만은 1에서 1만까지의 1만개의 자연수 원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연수 1만이 있는 것으로 그 아래로 9999개의 자연수가 있을것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서수는 자연수가 아니라던가,
한발짝 양보해서 자릿수가 무한한 자연수(자릿수가 순환하든 비순환하든)는 자연수가 아니라는 소리는

역으로 자연수로서 가질수있는 자연수의 갯수에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에는 자연수는 유한집합이라는 소리에 불과하다.



나는 이 사람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자연수의 기호로 사람들은 n이라는 소문자를 사용하는데, 이건 이 n에다가 자연수의 속성을 지키기만 한다면 어떤 수를 차용하여도 상관없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무한히 큰 자연수는 그 다음수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n+1이나, 알레프+1, 혹은 알레프+알파는 어떨까?

그러면 얘네들은 그냥 n+1=n이며 물방울 하나 더하기 물방울 하나는 물방울 하나에염. 이러고 끝날거 같다.
(실상은 그렇지 않겠지. n+1=n의 경우에 n에다가 어파스트로피같은 점을 붙인다거나 줄을 긋는다거나 아무튼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은 많다. 그게 귀찮으니까 그냥 n이라고 해도 괜찮다.)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에 왜 그렇게 집착하세염, 수학은 인생사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것이니까 니 작은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염. 이러는거 같다.


그러나 사물과 현상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파악할수 있느냐, 나는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버려야하느냐를 알려며는 역시 숫자감각과 분별력을 기르는게 좋지 않을까? 그에 관련된 내용이 아니면 그냥 핏 웃고 관심주지 않으면 된다. 니 시간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그냥 나같은 사람 무시하고 니 시간을 충실히 보내며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만나며 데이트나 하는게 더더욱 보람찬 일이 될 것이다.

무한서수라...


이런 소리를 첨들어서 이번엔 여기에 대한 감상을 한번 적어본다.

음... 내가 실수 전체 집합을 세는 방법으로
자연수의 자릿수를 거꾸로 세듯하여 0부터 1까지 세는 법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아울러 이렇게 순서대로 나열된 0과 1사이의 실수들을 x축에 두고 자연수를 y축에 둔 가상의 좌표평면을 만든다면 양의 실수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셈이고, 양의 실수를 순서대로 나열할 수 있다는 소리는 곧, 실수 전체를 나열할 수 있다는 소리도 된다. 정수에서처럼 0을 사이에 두고 음양을 번갈아 오고가면 되기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연수 100(그러니까, 0과 1사이의 실수를 순서대로 나열했을때 100번째)에 해당하는 수는 0.01이 된다.
물론 음수가 아닌 실수라고 범위를 확장하고 싶다면 저기서 0을 추가하고 그 순서를 하나씩 미루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방법의 궁극적인 문제점은 아무리 세어도 유한소수에 불과할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백억개의 백억개의 자릿수를 가진 소수(그게 자릿수가 순환하든 비순환하든)를 센다하여도....
그건 어차피 자릿수 갯수가 정해진 유한소수일뿐이다.
내가 아무리 무한하게 센다하여도 그것은 결코 무한소수가 아니다. 백억개의 백억개의 백억개의 백억개라도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무한서수가 자연수가 아니라면
무한히 많은 자릿수를 가진 자연수는 자연수가 아니라는 소리인가?
그러면 자연수라고 규정할 수 있는 수는 자릿수가 무한하지 않다는 소리인데, 이건 자연수라는 집합이 유한집합이라는 소리로도 통한다. 만약에 자연수라고 할수있는 자릿수 갯수가 백억개의 백억개의 백억개의 백억개정도라면 그것은 엄청 많을뿐이지 무한하다고 말할수는 없다.(무한히 많다와 무한하다는 다르니까.)

이런 모든 점을 따진다 하여도...
내가 알기로 서수와 자연수와 기수는 다른 개념인걸로 아는데, 자연수와 실수의 일대일 대응을 논하면서 집합과 그 멱집합의 일대일대응을 논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무한서수라는 개념이 튀어나오다니 어떤 맥락에서 무한서수라는 개념을 반론의 근거랍시고 내놓는 것일까. 

이것이 과학적인 사고에서 나온것인지 나는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잘 모르겠다.

요즘 여사원들이 내얼굴만 보면 얼굴을 굳힌다.


아 씨발.

여자들하고 문제생길까봐 그네들 근처에도 안가고 말도 안걸고 아무튼 아무런 상관을 안하려고 아무런 접촉을 안했는데,

다른 사람들이랑 생글생글 잘 웃는데 내가 오면 정색이다.
오노.

이건 내가 여자들에게 관심받고 싶어한다는 증거이겠지.
난 여자의 미소를 참 좋아하지만.. 뭐랄까...

아무튼 내 얼굴이 그렇게나 좃같아서 그런가, 아니면 내 처지가 존나 좃같아서 그런가.
열등감에 열폭을 하게된다.

그냥 나는 사람들을 보고 내 모습을 투영할뿐이지만, 이 마음의 동요는 설득하고 인지한다고 하여 쉽사리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빌딩 숲사이에서 철근으로 된 나무를 타고다니며 강철과 고무로 된 농작물에 비료를 주고 수확하며 화학약품 냄새를 음미하는 공장 노동자.


... 아 쓰고보니 좀 찌질하군.
야흥. 

섹스를 위해서 섹스를 포기한다.

복수를 위해서 복수를 포기한다.
목적을 위해서 목적을 버린다.
진정한 목적을 위해 목적을 버린다.


싸우지 않으면 지지 않는다,
싸우지 않으면 이기지 않는다.


싸우지 않으면 만사가 평안할거 같고,

싸우지 않는 사람은
만사가 평안하게 살거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싸움을 걸어오는 상황에서
싸우려하지 않는 것또한 싸움의 일부이니까.


만사가 평안하느냐에 따라 싸우느냐 싸우지 않느냐를
결정할뿐. 목적이 없다면 싸우느냐 싸우지 않느냐는 구체적인 행동은 별 의미가 없다.

생각해보면 도덕경을 지은
노자는 승부를 회피하며 인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저 흐름을 타려고 노력했을뿐이다.

남의 학다리를 부러워하며 절망하는데 인생을 쓰기보다
나의 오리다리를 적절히 사용할 곳을 찾아야겠다.

학이 짧은 따리를 가졌다면 그건 잘못이지만,
오리가 학처럼 긴다리를 가지지 않은 것은
다름에 다름아니다.

오늘 낮의 내 행동을 보면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귀찮은 일을 했는데,
그로 인해 벌어질 인식을 생각해보면


나는 귀찮은 일을 피한 것이 아니다.
이게 참 부끄럽군.

다음에는 그냥 그때그때 내 근성으로 일을 해야지.
하다못해 다음에는 내용물이
쏟아질 요인을 생각해서 좀더 신중하게 접근하도록하자.

그래서 남들에게 내 특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하자.


나를 응원하고 도와주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게 놔두자.

단 흐름을 타기위해
나에게 적대감을 느끼게 하지 말자.

그런데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하루하루 충만하고 행복한 보람을 느끼게 할까?
난 그런게 지금까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난 당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0.333...333이라는 순환소수를 자연수처럼 셀수 없다고 말하는건



달리말하면

333...333이라는 3으로만 자릿수가 구성된 무한히 큰 자연수를 셀수 없다고 말하는것과 다르지 않다.
(혹시 내가 잘못알고 있는거라면 말해도 좋다. 예를 들면 이런 말도 좋다. 무한히 큰 자연수는 자연수라고 할 수 없다고.)

그것이 아무리 무한하게 커도 소숫점이하의 값을 갖지 않으며 10진수의 법칙을 따르면서 양의 정수에 속한다면 일반적으로 자연수라고 한다.
그것이 10만이든 10억이든 10경이든, 자릿수가 백억개든, 백억개의 백억개이든말이다.

무한집합이라는것은 조건제시법에 제시된 조건을 지키며 끝도 없이 무한히 세어나가는 것이다.

333...333이라는 무한히 큰 자연수는 0.333...333이라는 순환소수에 일대일대응한다.
333...331이라는 무한히 큰 자연수 또한 마찬가지이다. 0.133...333이라는 순환소수에 일대일 대응한다.

이런 법칙에 따르면
임의적으로 자릿수를 생성시킨 그 어떤 자연수라도 각각 0과 1사이의 실수-그것이 유한소수이든, 무한소수이든, 순환소수이든 비순환소수이든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수 있고, 0과 1사이의 실수가 전체 실수에 대응한다면, 그 또한 실수와 자연수의 일대일 대응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면 여기서 또 문제점이 하나더 생기는구나.

0과 1 사이의 무리수는 무리수 전체집합과 일대일 대응할 수 있는가 없는가,
무리수는 무리수의 부분집합과 일대일 대응할 수 있는가 없는가이다.(무리수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기위해 우리는 무한히 많은 비순환소수를 제외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누군가의 말처럼 간단명료한 탄젠트 함수를 사용하면 가능하게 될거같기도 하지만 이건 내 지적능력밖의 일이니 시간남는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기로 하고 마무리를 짓도록하자.

아마 이건 무리수를 어떻게 구분하고 체계화시키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다.

예를 들어 무리수 파이는 원주율을 말하는데 원주율은 지름에 대비하는 원주의 비율 의미한다. 지름이 1일때, 원주율은 파이가 되고, 근사값은 3.14정도.
(그런데 파이를 곱해서 자연수가 되는 수가 있을까?)
그러므로 파이 자체는 하나의 법칙으로 세상 모든 '정'원과 자연수 사이의 패턴을 의미한다.(타원에 대해서는 모른다.)
제곱근 3제곱근들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건 마치 3파이, 12파이하는 식으로 루트3, 루트12로 붙인셈이다.
만약에 파이가 단순히 한개의 무리수로서만 끝난다며는
제곱근들또한 제곱근을 구성하는 자연수들이 아니라 루트라는 괄호의 기호하나로 끝나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무리수의 영역은 터무니없이 줄어들거나 재구축되고 만다. 왜냐하면 단순히 법칙만 남거나 대책없이 늘어나거나이기 때문이다.

무리수의 부분집합을 임의로 제곱근들의 집합으로 만든다면 이 집합은 모든 실수들에 대해 제곱근을 가질수 있을까 없을까?
0을 무리수라고 할 수 있을까? 1은 어떨까?
실수까지 가기도 뭣하다.
자연수는 어떨까? 제곱근 중에서도 무리수가 될수 없는 놈들은 모조리 빼버려야하기때문에 무려 무리수인 주제에 자연수에 대응할 수 없는 놈들은 셀수없이 늘어난다. 더 쉽게 말하면 무리수의 부분집합인 무한집합이 자연수보다 작아진다는 것이다.

이건 개념의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러분돌 알다시피, 제곱근이라는게 굳이 무리수만 되라는 법은 없기때문이다.
단순히 제곱근의 문제라면 제곱근은 실수의 부분집합일까 아닐까? 이 집합은 실수보다 클까 안클까?
이 역시 제곱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어쩌면 오랜만에 울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방어기제가 매우 강력하고 유연한터라 쉽게 울지는 못하겠지. 게다가 일하다가 잡생각에 빠지면 사고내고 죽을 가능성도 높거든.

아무튼 이 일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겠다.

슬슬 졸업시즌도 다가오고 어둠속에 빠져들때가 왔다.

그러고보니 이번 방학은 울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렸네.

백수신세가 되면 나 자신이 더 처량해져서 더 잘 울수 있을거 같았는데...
은근히 바쁘게 보내느라 울지를 못했다.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

라이온류에서 여동생이 맞아죽는 장면은 미묘한 장면이다..... 10.라이온류


이것때문에 근 1년째 라이온류를 못쓰고 있다.

마치 심청전에서 심봉사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사족을 붙이는 것처럼, 지금 내가 그러고 있다.
조만간에 수업다듣고 나서는 한편씩 이어 쓸 생각이다.

내가 현실에서 쓰는 어휘를 생각해보았다.

잘 못들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주문을 상세하게 듣고 피드백해주는 것.

예를 들어, 닉네임씨, 이걸 저렇게 해서 저걸 이렇게 처리해주세요 따위의 주문이 있으면,

예, 이걸 저렇게 해서 저걸 이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따위.

가끔씩 상대방이 짜증을 내며 동의를 구할때에는


아 마음 고생이 크시군요.
라거나
힘드신데 고생이 많습니다.
라거나

아니면 아, 그랬군요. 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바뒤랭귀지 따위로 이야기한다.

누구처럼, 그러시겠죠 따위로 이야기하면 빈정대는 수준이니까, 이 다섯글자가 상대를 적으로 만든다.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살얼음판 걷듯이 나는 조심조심 사람들을 거리를 두고 대하려고 한다.(요즘은 이게 잘 안된다. 큰일이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같은 말만 이야기하면 내 의도가 뽀록나기때문에 레파토리를 다양하게 만들려고 한다.
이건 국문과 다닐적에 익힌 몇가지 스킬로 때우고 있고,
상담심리학에서 배운 사람을 대하는 기초적인 원칙(상대방의 저항을 무너뜨리려고 하지마라, 너의 주장을 고집하지마라.)을 철저히 지키며 입을 다물고
회계학과 따위에서 배우고 있는 걸로 그 사람과 상황에 대한걸 수치화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쁜 소식이 세번이나 들렸기때문에 내가 이 소식을 무전기로 전파한다면 통솔자가 더더욱 기분나빠하겠지. 그러면 작업상황이 더 혼란스러워질테고, 작업이 두세개쯤 늘겠구나.

그래서 한개의 작업을 더 해서 앞으로 다가올 열개의 작업을 원천차단하는 식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래서 남들은 100을 일하여 200을 받아갈때에 난 80만 일하고 200을 받아간다.

이게 내가 현실에서 쓰는 어휘들의 원천이 된다.
이것마저 없으면 현실에서 내가 쓰는 어휘래봐야.

직장에서는
예, 혹은 알겠습니다. 로 끝이고.

집에서야,

킬킬킬. 읍 우으윽 흑흑.

으로 끝이다.

말수를 줄인지 육개월이 다되어가는 지금 나는 서서히 말을 더듬기 시작하고 있다.
무의식은 쏟아내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내 의식을 파고들어 한꺼번에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 혓바닥이 그 흐름을 따라줄리 만무하다. 이렇게 되면 나는 말을 더듬을수밖에 없게된다.

남들하고 말은 안해도 더듬이가 되는건 내 생존에 곤란하니 내일 아침부터는 10분이라도 책을 낭독해야겠다.
천천히. 또렷하고 확실한 발음으로 말이다.

애초에 내가 블로그를 연것은...


나의 패배감을 곱씹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였다.

무엇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살의 유혹에 허덕이면서도 한결같이
자살하고 싶지 않다고 외쳤다.

그 당시 내 머릿속에서 블로그 포스팅할 문구를 인풋하던 똥덩어리들은 더이상 내 생활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막연하게 짚어보면 초반이었을거다.) 나는 나에게 주던 상처를 남에게 전이시키기로 마음먹은듯 했다.

그래서 난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어째서 나에게 더이상 상처를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내가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같쟎고, 초라하고 볼품없이 양심에 찔린채 쪼그려서 죄책감에 흐느끼던 그 나날의 나는 대체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실용과 합리, 현실과 이상, 과거와 미래.

그러나 현재의 나는 남들의 기대감이 무거워 도망치기 일쑤인 비겁한 도망자.
나는 과연 그에 대해 그 어떠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아도 좋을까?

책임을 다하고 떳떳한 인생을 살려며는-더이상 도망치지 않으려면-그러면서 삶의 기반을 잃지 않으려면

나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할까.

방안에 쳐박혀 영화나 애니를 보며 마음을 달래면 될까?
아니면 개학도 했으니까, 다시 심리학과 회계학에 매진할까.

내가 앞으로도 살아가려면 나는 무엇부터 해결해야할까.

내 수많은 문제점 중에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은 어느것일까?

어떻게하면 자제력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괴롭지 않게 인생을 살아갈수 있을까?

변화되는 내 주변이 두렵다. 그래서 요즈음은 다시 도망의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도망치면 나는 같은 인생을 반복할거 같다.

한가지의...
같은 배경, 같은 인물, 같은 주제 속에서
나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들은 서로를 간섭하는듯도 하고 안하는듯도 하다.
절망이 희망을 누르려할때, 내 마음은 평정을 되찾기 위해 희망을 키운다.

그리고 그 희망이 비현실적이고 그 희망을 위해 포기해야할 현실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또다시 절망을 키운다. 그리고 나는 이 희망과 절망이 만드는 힘의 균형을 묵묵히 지켜본다.

내가 인내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균형과 수평을 맞출 능력-자제력이 없기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희망과 절망의 수평을 맞추지 못하고..

수치심을 안은채 이렇게 잠들어야한다.


...
나는 잠들고 싶지 않다. 

요즘은 체력이 고갈되어서

포스팅을 할 여력이 없다.

나의 홈그라운드에서마저 눈팅만 하고 나오는 경우가 부지기수.
그것보다는 아마...

음.. 뭐라고 해야할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양자역학에 대한 역설로,
상자 안의 고양이에게는 생과 사가 공존해있다는 개소리가 해당한다고 해야할까...

나는 무언가에 대한 희망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희망에 대한 절망을 느끼며 끊임없이 열폭하는 것이다.
희망으로 절망을 누른다거나, 절망으로 희망을 누른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야말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상자 안의 시한폭탄과 함께 하며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한 그런 상황이다.
같은 배경, 같은 시간, 같은 사람들에 대해 희망은 희망대로 느끼고, 절망은 절망대로 느낀다.

그리고 요즘은 이 희망과 절망사이의 괴리가 점점 벌어져서 어쩌면 내가 미쳐가고 있는게 아닌가 햇갈리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도 어쩔수 없다.
혹은
이렇게 살아도 상관없다.

로 나간다.

지금 내 상황은 이렇게 살아도 어쩔수 없다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요인을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갈등을 느끼지만 그 갈등을 껴안고 계속해서 살아가야한다.
한편으로 또다른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요인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요인이 어떻든간에 갈등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않고
상관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내가 이렇게 살아도 나는 상관이 없다인 것이다.

상관없다와 어쩔수 없지.

이건 같은 뜻을 말하는듯하지만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그런데 나는 이걸 짤막-간단 명료하게 표현할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피해를 입어도 상관없다.
내가 이렇게 피해를 입어도 어쩔수 없다.

남이 이렇게 피해를 입어도 상관없다.
내가 이렇게 피해를 입어도 어쩔 수 없다.

이 두가지 상황에서 갈려지는 네가지 문장을 읽으며 여러분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나는 이렇다.

내가 피해를 입는 상황이라면 어쩔수 없다라고 느끼기보다는 상관없다는 자세로 살아가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이 피해를 입는 상황이라면 상관없다고 여기기보다는 어쩔수 없다는 자세로 살아갈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대하는 자세와 태도는 상관없다, 아무렇지도 않다. 문제가 아니다.가 되는데,
내가 남에게 대하는 자세와 태도는 어쩔수 없다. 견뎌내야한다, 한동안 미뤄둘 문제다.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 두가지 상황 중 어떤 상황을 택하더라도 나는 남이나 나를 상처주게 될 것이다.
(상처만 주는건 아니지만 일단 상처라고 하자. 이건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내가 나 자신에게 아무리 미안해해봤자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나에게 미안해해도 나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용서하려면 그건 입에 발린 실천없는 사과-속임수로 이 상황만 잠시 넘어가보려는 수작따위가 아니다.
내가 나에게 필요한건 진실된 행동과 마음에서 나온 성과.

그러나 나는 내가 남에게는 조금쯤 미안해해야한다고 본다. 그리고 남은 나에게 조금쯤은 미안해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

아무리 쓰레기 같은 사람이 있더라 하더라도...

저 쓰레기같은 놈은 저 진상같은 짓을 해도 잘먹고 잘사는데 나는 왜 이꼴로 살까, 내가 사는 방법이 잘못된 것일까?

까지는 맞는 질문이고 올바른 접근이지만, 그 결론이라는게,

'그래 나도 저 쓰레기같은 놈이랑 똑같이 살겠어.'는 곤란한 일이다.
그야말로 백로가 까마귀에게 물들어 흑조가 되는 격이며, 묵을 가까이하다보니 손이 검게 더러워지는 격이다.

내가 불러온 나 자신의 피해에 대해 어쩔수 없지라는 자세로 있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고 체념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피해를 불러온 행동을 고치지 않겠다는 소리이다.
내가 불러온 나 자신의 피해에 대해 상관없지라는 자세는 피해를 감수하며 그에 대해 그 어떤 미련을 갖지 않겠다는 소리도 된다. 

남이 불러온 나 자신의 피해에 대해 상관없지라는 자세와 태도로 있는 것은 자신이 입은 피해에 시선을 빼앗겨 중요한 것을 놓치는 행동을 예방하는 결과를 준다.

그러나 내가 불러온 남의 피해에 대해 어쩔수 없지로 있는 것은 남에게 끼진 자신의 악행을 묵살하겠다는 소리이다.
상관없다또한 비슷하다. 이건 더 심각하다. 남이야 피해를 입어도 나는 개의치 않겠다는 소리이니까.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하느냐는 문제는...

결국 행동학적인 관점에서 봤을때에...

어떻게 행동을 설계해나가야하느냐, 정서조절을 위해 어떤 방어기제를 강화하고 감소시켜나가느냐라는 문제와도 같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습관과 보상처벌체계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번거로운 것들이 있어도 본인의 강력한 실천력이 없으면 행동경제학이나 행동심리학의 할아버지할머니가 와도 해결할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상관없다와 어쩔수 없지가 우리의 강력한 실천력이나 각오를 좀먹는 덜떨어진 사고방식은 아닐까?

마음이 아플때는.


사실 마음 속에 칼이 꽂혀져있는 때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 칼을 뽑아내지 않는한 고통은 끝나지 않고 상처는 덧난다.

사람들은 피를 질질 흘리더라도 이 칼을 뽑아낼 것을 두려워한다.
이 칼을 뽑아내면 더 많은 피를 흘릴것이며 심지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기때문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칼을 뽑아내야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으며..

이 칼을 안전하게 뽑아내기위해 술을 마시고 여자를 빨고 도박을 한다.
그렇게 고통을 잊은 사이에 칼을 재빠르게 뽑고 마음의 상처를 지혈.

그리고 그때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 판단하기도 한다.

마음의 칼이 꽂혀질 것을 두려워하며 기피하는 사람이 있고,
마음의 칼이 꽂혀지더라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25살까지의 나는 칼이 꽂혀질게 두려워 사건을 피하는 사람이었다.

....


어느쪽이라도 마음의 결과가 시궁창이라며는
이것은 마음의 시궁창이니까, 사실은 특별한 시궁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칼을 다시 마음 속에 꽂아넣기로 했다. 몇번을 찌르고 뽑고를 반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요즈음은 피흘리며 살아가는 기분이다.

적당한 때에 이 칼을 뽑기는 뽑아야하는데 그때는 언제가 될까.

나는 무엇으로 그 때를 판단할 수 있을까?

다음 포스팅은 자세와 태도에 대한 포스팅.

'상관없다와 어쩔수없지.'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서 쓰겠다.

세상에서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환경이 지배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대략 80퍼센트정도.

나머지는 20퍼센트는 각 개인에게 달려있는데..
사실 이 20퍼센트를 어떻게 쓰느냐에 인생의 80퍼센트가 바뀐다.


1950년대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의 패턴을 보면, 전후의 폐허 속에서 되살아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그들의 무지하다고 여겨질만한 희생정신 속에 있었고...

위정자들은 그런 희생정신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며 이게 정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들 자신이 그런 희생정신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는지는 논외로 하자.)

하지만 그런 가난한 베이비 붐 세대들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직간접적으로 잘 아는 우리는 그들처럼 희생하며 살고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이 피흘려가며 만들어놓은 밥을 먹는것도 죄책감이 들거니와, 그들처럼 피흘려가며 사는 것또한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저기저 백범이라는 유저처럼 어른들이 피흘려가며 날 길러준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내 후배와 배우자를 피흘려가며 부양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선배들처럼 우리도 희생하고 헌신해야하는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자리는 그런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 말하는 자리가 아니다.

이 포스팅의 주제는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느냐이다.

물론 서두에 밝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다.

마태복음에 이런 소리가 있다던데.

있는자는 더 풍요로워지고, 없는자는 있던것마저 빼앗겨 가난해질거라고.

실제로 베이비붐 세대들이 그렇게 자라났다.
그나마 미 육군출신인 서진규씨나, 노르웨이의 라면왕같이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을 버리고 더 잘사는 나라에 정착해버린 사람들은 더 잘사는 나라의 환경 속에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며 나름의 행복을 가꾸어나간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외적 요소들을 모조리 떨쳐버리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고민하는 것은

내 환경과 나 개인 사이에 어떻게 이해와 화해를 가져와서 진정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느냐이다.

베이비붐 세대 중에 해외파 세대들은 맹모가 삼천하는 격으로 환경의 중요성을 뼈저리가 알고 있다.
그래서 해외원정출산으로 이중국적을 가진 뒤에 양쪽의 이익을 모두 얻는 방법도 빠트리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한 개인이 그 자신의 재능을 하루라도 빨리 발견하고 그 재능을 숙성시키는 시작시간을 앞당긴다.

그리하여 있는자는 더더욱 풍요로워지고 없는자는 그 있던 것마저 빼앗기는 세태는 아주 글로벌라이제이셔널한 상황이 아니라할수 없겠다. 

한 사람이 자신이 속한 환경을 떠나지 않고서 그 환경을 바꾸고 그 사회를 바꾸고 주변의 힘을 뒷받침하여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나는 그런 길은 잘 모르지만, 그런 길을 불러올수 없게하는 요인은 아주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바로 저 백범이라는 유저처럼 양 진영을 오가며 불신과 증오를 심어주는 사람이다.
사고가 타졌을때에 불신과 증오가 곁들여지면 사고가 끝나도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갈등 속에서는 이해와 화해와 평화와 사랑이 깃들수 없다.
증오와 불신은 갈등을 더더욱 심화시키고 그나마 남아있떤 이해와 화해와 평화와 사랑마저 종식시킨다.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면 증오와 불신만 남게되고, 자신이 이해하고 화해하며 평화롭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밖에 남지 않게될것이다.(하지만 요즘은 자기자신조차 증오하고 불신하는게 대세이다.)

그나마 그 불신이나 증오가 제대로된 방향과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면 모르지마는

혼잡하다.

저 백범이라는 유저처럼 비로그인으로 들어와 걸핏하면 홍어드립이나 하고 자빠져 앉아있으면 그런 비속어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되고, 저런 백범이라는 유저같은 사람들만 남는다며는 문제해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증오와 불신때문에 문제해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런 세상에서는 자기자신마저 사랑할수 없게 된다.

나는 '인간이 지향해야할 방향'을 일부나마 제시할수 있는 장애인과 트랜스젠더를 존중하지만, 게이나 바이들은 그럴수 없다고 보기때문에 가급적이면 격리하고 멀리해야하며 가능하다면 때려죽여야한다고 본다.
이런 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려며는 게이나 바이들에게도 '인간이 지향해야할 방향'이 있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저런 백범같은 유저는 그런게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먼 미래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없다. 먼 미래나 큰 맥락을 외면하려는 백범유저같은 사람이라면 그런 수치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대해,

플라타너스에게 산소를 낭비해서 미안하다고 말한후 자살할거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나를 불행하게 했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김대중 개새끼도 아니고 전라도 깽깽이나 홍합이니 자시니하는 잡것들도 아니다.
너를 불행하게 했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김대중 개새끼도 아니고 전라도 깽깽이나 홍합이니 자시니하는 잡것들도 아니다.

그건 바로 나/너다.

김대중 개새끼를 외치기전에 너 자신의 본질에 맞게 처녀나 감별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며 그런 처녀감별 이전에 먼저

나는 왜 이따위 댓글을 달까?
이렇게 댓글을 달면 나에게 무엇이 돌아올까?
이걸로 나는 보람과 행복을 느낄수 있나?

를 고민해야할 것이다.

보람과 행복만 느끼기에도 부족한 세월인데 내 세월과 시간을 더이상 낭비하지 마라.

요즘 백범이라는 이글루스 유저가 나보고 김대중 개새끼해보라고


야단이다.


난 누구처럼 생각해보거나 고심해본적도 없는 것에 대해 아무거나 추천하고 아무거나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다.

니가 지금 하는 소리래봐야,

'니 이웃집 사람은 개새끼라고 말해봐.' 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근데 나는 내 이웃집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개새끼라고 말하는것도 뭣하고, 내가 누구처럼 김대중씨를 칭찬해야한다거나 너처럼 모욕줘야한다는 소리는 그건 내 정치적 편향성의 방향을 정하라는건데, 나는 너네들의 편가르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있는건 어디까지나 문제해결일뿐.)

그것보다 디시인사이드같은데에 내 블로그 광고하고 다니면서 웃기는 포스팅이라고 떠드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해주지 않으려나...

뭣때문에 내가 김대중 개새끼라고 해야하는지 그것으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백범이라는 유저는 한번 시원하게 털어놓았으면 좋겠다.




하긴, 너는 예전부터 할말없으면 김대중개새끼라고 떠드는게 다였지.
좀 큰 맥락을 보고 판단하면 안될까? 니 머릿속의 똥덩어리때문에 그런거라면 일단 나처럼 머릿속의 똥부터 치우는게 순서가 아닐까?

더-골로 보는 직장인의 화두는.


독신남의 경우 개인생활과 회사생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고,
유부남의 경우 가정사와 회사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독신남의 경우는 모르겠는데, 유부남의 경우라며는 회사에서 휴가를 준다고 해도 그것이 정녕 휴가일수는 없다.

가정을 꾸린 이상 아내를 보살펴주어야하고 자녀를 복돋아주어야한다.
그것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런 보람조차 느끼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건 휴가일수가 없다.
(그래서 나같은 사람은 휴가를 최대한 짧고 자주가는 식으로 짠다.)


회사를 열심히 경영하고 자기 가게를 열심히 경영하여, 뼈가 가루가되도록 까이면서 열심히 일하는데 들어오는 돈은 갈수록 적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경제가 불황이서일까아니면 경영방식이나 작업방식에 문제가 있어서일까?

해답은 양쪽 다에 있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느 한쪽에만 초점을 둔다면 제대로된 해결책이 안나온다.
단순히 경제가 불황이거나 호황인것에만 가게의 수입이 결정된다는 것은 가게를 어떻게 운영하든 일을 어떻게 운영하든 돈이 들어온다는 소리인데, 이런 논리에서는 발전이 없다.

그러면 후자인 경영방식이나 작업방식에 문제를 두는 것은 어떨까?
여기는 그나마 많다.
요즘 회사들은 젝웰치식의 인력감축을 긴축재정이랍시고 내놓는데, 내가 일해왔던 여러 공장들은 인력이 없어서 감시의 손길이 적어지는 경우를 봐왔다.

그리고 그런 감시망이 좁아졌을때에 사고가 나면 그 사고는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수십억원의 클레임을 불러온다.

회사가 100억원어치 물적, 인적 자재를 사서 110억원어치 매출을 내고 10억원어치 순수익이 남는다면
(제지업계의 선두주자인 무림pnp의 펄프파트쪽을 기준으로 했다. 이 회사는 6천억원어치 팔아서 600억원 남긴다.)

그 회사는 100의 일을 했을때에 10억원의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나 저런 클레임 하나터져서 1억원어치의 손해를 보았다면 그걸 매꾸기위해 더 많은 자재(이 경우 인적자재의 구입은 최후의 최후의 결정이 된다.)를 구입해서 1억원어치의 손해를 매꾸게 된다. 그러니까, 10의 일을 해서 1의 수입을 얻는 식이니까, 저 회사는 추가로 10억원어치의 매출을 확보할 수 있을때에야 저 클레임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저 1억원때문에 10억원어치의 일을 끌어온다하더라도 순이익이 남지 않는다. 그냥 전년대비 본전이다.

근데 정말 본전일까? 결론은 아니다.

100의 일만 해도 벌리던 10을 109 정도의 일을 해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만큼의 원가절감을 위해 피나도록 노력을 하고 일을 더 많이 하지만 회사에 실질적으로 들어오는 돈은 줄어들고 사업영역도 줄어든다.

이 영세업체를 기준으로 봤을때에 9퍼센트 정도 일을 더해야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건 어디까지나 평균. 뭐 마케팅이나 영업의 달인이 있다고 해도 노동자들이 일하는 비율은 9퍼센트정도이거나 그 이상일 수 있다.)

365일간 일하던 것을 기준으로 했을때에 9퍼센트 더 추가되는 셈이니까, 대략 30일정도를 더 일해야한다. 더 쉽게 말하면 그해 휴가를 모두 반납하거나 그만큼의 잔업을 더 해야한다는것이다.

그만큼의 인적자재비용이 늘어나고 그 부대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런 상태에서 인력을 줄이면 인력들의 피로도는 높아지고 그런 피로 속에서 감시에 필요한 주의력이나 정신적인 자제력이 떨어지고 그만큼 클레임률이 높아진다.

이런 추세로 클레임이 한두번만 더 일어나면 이 100억짜리 매출 회사가 망하는건 당연한 일이다.

1000억짜리 매출, 1조짜리 매출이라 해도 안심할바가 안된다.
삼성전자같이 시가총액 120조 짜리 회사라해도 안심할바가 안된다.
사람이 같은 실수를 같은 비율로 저지른다며는 10배로 큰 회사는 10배로 실수를 더 저지를 테니 회사가 크다고 해서 안심할건 없다.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저런 클레임이 불러올수있는 잠재적인 손실과 위험발생률은 겉잡을수 없이 커지고야만다.

대표적으로 보면...
리만브라더스인가 골드만 삭스인가, 세계적인 금융기업이 망했던 것은 28살짜리 신입직원이 주문을 잘못입력했던 것에서 시작했던 것을 예로 들수있다. 그 실수를 메꾸기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지만 오류가 오류를 상쇄시키지 못하고 증폭시켰던터라 이 회사는 망하고 말았다.

문제조치를 어떻게하느냐가 중요한데, 기업들은 인력들을 마른걸레 쥐어짜듯 짤줄만 알지 제대로된 해결책을 내놓을 줄은 모른다. 같이 고민해줄줄도 모른다.
사무실에 앉아서 계산기 두들기면서 아, 전년대비 이만큼 손해를 보았으니 인력을 감축해야겠구나. 이러고 끝이다.

그러면서 회사를 위해 가정사를 희생하라고 한다.

근데 회사를 다느니는 것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인데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할수록 가정사에 소홀해지고 가정이 불행해져 파탄나고 회사에 들어오는 돈이 줄어들어 결국에 실업자가 된다면,

이것은 어디에 책임이 있을까?

개인의 책임이라고 단정짓지 말자. 개인의 책임에 불과하다면 그건 사람을 짜르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근데 사람을 자른다고 해서 문제가 눈에 띄게 개선되지 않는다며는(사업을 2~3년만 하고 치울것도 아니쟎아.)

그건 회사의 가게의 경영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작업방식에 있는 여러 문제사항들을 개선할 방법을 찾는 것이고
상층부는 그런 사항들을 최대한 돈이 적게드는 방법으로 조율해서 꾸준히 작업환경을 개선해주어야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게 안되는 기업들이 너무 많다.

여러 기업들에 회장님이니 사장님이니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는 하는데, 나는 이사람들이 정말로 자기 회사네 기계들이 돌아가는 구조를 알고 시찰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다녔던 어느 기업에는 원자재를 섞어주는 거대한 탱크의 뚜껑이 탱그내부의 기압때문에 떨어져나가지말라고 철판과 철판사이에 가스캣이라는 고무플라스틱 소재를 끼우고 그 외곽에 여러개의 볼트로 조아주고 있었는데, 볼트를 약하게 쥐면 그 사이에서 자재들이 세어나와 바닥을 적시므로 볼트를 세게 쥐어주어야한다.
그러나 볼트와 너트의 특성상 너무 심하게 조아주면 볼트의 나선이나 볼트의 형체 자체가 박살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면 볼트를 열고닫는데 드는 시간과 근력이 더 많이 투자되어야하고 볼트가 박살이라도 나게되면 그건 큰일이다.

자제가 새어나가 원가손실이 발생될게 우려된 사원들은 역사나 볼트를 강력하게 조아대었고, 내외부의 압력을 못견딘 볼트는 탱크에서 떨어져나가고 말았다.

근데 그 볼트의 강도를 높이거나 보수해주는 것이 상당기간 지체되어있었다.

그 볼트가 감당했던 것을 다른 볼트들이 감당하게 되니 자기 능력밖의 압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볼트 주변의 다른 볼트들도 연쇄적으로 박살나기 시작했다.

아마 이대로 두세달만 더 지나면 아무리 세게 조아대도 연료가 새는 것을 막을 수 없게될것이다.


이런 초등학생도 알만한 것이 뭐 플랜트 기술자들만 알법한 고급기술들인 것도 아니고 조금만 생각해도 알수 있는 것인데, 허다하고 찾아오는 사장님들 회장님들은 그냥 회사에 놀러오는 것인지,

회사의 청소상태만 살펴보고 끝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난 이 양반들이 뭣하러 오는지 모르겠다.

이 양반들 올때마다 쓸데없이 청소에만 신경쓰고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책을 못세운다.

정치적인 문제여서인지 몰라도 어느기업의 기계 운전파트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기계 운전이 미덥지 않아 프로젝트 완결이 어렵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에게 기계가 한것처럼 스티커를 붙이라고 지시하기도 한다.

자리보전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중요한건 문제해결이 아닐까?

인적자재를 삭감하여 매년 3천만원 5천만원x알파를 한다하더라도 자를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을텐데,,,,
사람만 자르고 쥐어짜기만 해도 정말로 문제가 해결이 될까?

정치적인 문제로 협력업체나 아웃소싱업체에게 패널티를 주어 책임을 전가하면 원청업체에게는 진실된 이익이 생긴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회사들에 몸담고 있는 가정들에 행복이 있을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이런 가정들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밝은 미래를 찾아볼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러치안타!!

...
...
;;;

더 골에 보며는 제약이론 중에 병목자원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행군으로 비유하면 맨 후미에서 대열에서 멀리 떨어져 이탈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고
쇠사슬에 비유하며는 가장 약한 경도를 가진 사슬부분으로 볼 수 있다.

선두집단이 아무리 빨리 골에 도착하더라도 후미가 도착하지 않는 이상 그 집단이 골에 도착했다고 할수 없다.

쇠사슬을 이루는 사슬하나하나가 아무리 튼튼하여도 그 쇠사슬의 전체적인 강도는 그 쇠사슬 중 가장 약한 쇠사슬이 결정짓는다.

행군에서 선두집단은 그냥 제 속도로 달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후미로 갈수록 달라진다. 10명이 달릴때 1명당 평균적으로 같은 빈도의 실수-이동지연을 발생시킨다면 후미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모든 이동지연을 메꿀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한다. 근데 그런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후미에 서게 되면 당연히 그 대열은 처질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이동지연은 전체적으로 확산되면서 북경의 나비 날개짓이 맨하탄을 침몰시키는 격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후미가 느리고, 쇠사슬중 하나라도 불량이라며는 쇠사슬은 끊어질수밖에 없고 대열은 골에 도착할수가 없다.

이 책에서는 그런 병목자원을 관리하여 회사의 이익을 혁신적으로 개선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건 회사운영에서뿐만이 아니라, 개인사나 가정사에서도 써먹을수가 있는데,

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요인 중에서 전체적으로 불행하게 하는 요인이 있다면, 그 요인부터 개선해나간다.

마치 행군에서 가장 느린 사람 순으로 대열을 재정비하여 대열의 이동속도를 높이는 것이라던가,
가장 약한 사슬순으로 사슬을 개선해나가는 식으로 전체의 튼튼함을 높여나가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 인생의 전반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얼굴이라고 믿는다면 일억원이 들든 10억원이 들든 성형수술을 하여도 좋다.
얼굴을 고쳐 인생을 혁신적으로 고칠수 있다면 사채를 끌어당겨쓰든 말든 그게 무슨상관인가.
그런 리스크를 감당하고서도 이득이 있을거 같으면 달려드는 것이다.(물론 그럴리 없다는 계산이 나오니까 성형수술에 회의적일것이다. 나도 그렇고.)

학력이 부족하면 학력을 고치고,

가정사에서 남편과 아내가 불화를 일으킨다며는 불화의 요인을 줄여나갈 방법을 찾아나가야한다.
더 골에서의 사례에서처럼 남편이 회사일로 바쁜데, 아내가 남편의 회사사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둘은 싸울수 밖에 없다.

남편에게 필요한건 아내의 내조인바...

옛 어르신들은 회사일을 가정에 까지 가져오지 말라고 하였지만, 나는 가져와도 좋다고 본다.
근데 가져오는 것은 형식이고 어디까지나 가정에 충실해야겠지.
가정에 충실했다가 짬이날때 집에 가져온 일을 하나하나씩 처리하고 나머지는 일찍 출근해서 처리하는 것이다.

이러면 좀 나아지지 않으려나?

 
 

말콤브레드웰의 아웃라이어.


한 사람의 성공은 그 개인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 주변의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라는 것이 이책의 한줄내용이다.
여기에서 가지치기를 하며 한권분량이 되는 것이다.

도입부에서는 어느나라의 촉망받는 하키선수들이 유사한 생일날짜를 갖고있는 것에 주목한다.
하키뿐만이 아니라 음악이라던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 도입부가 말하는 것은 영웅은 시대를 타고난다는것.

'시대'가 왔는데 영웅의 나이가 많으면 그 시대가 가져올 기회를 못보기때문에 시대의 덕을 볼수가 없고,
반대로 영웅의 나이가 적으면 시대가 가져올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이를 성경문구에 비유하면 마태복음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데..

있는자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없는자는 있던것마저 빼앗기게 되리라는것.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1940년대나 50년대쯔음에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패턴이다.
부모처럼 가난한 길을 걸어 가난하게 살거나, 아니면 부모처럼 부유한 길을 걸어 부유하게 살거나.

그리고 그렇게 가난한 부모밑에 자란 자녀는 안목이 짧기때문에 가난한 길만 보고 부유한 부모 밑의 자녀는 부유한 길만 본다.

그러나 그 시대가 갖고 있는 기회를 잘 타고난다면 인생역전은 가능하다는 내용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 이주해온 이주민 1세대의 경우 옷가게나 식료품장사라 시작해서 손자대에는 변호사나 의사같은 전문직을 배출하는 예를 심심치않게 보여주고 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자영업을 하는 부모가 자녀를 부려먹더라도 자녀에게 잔일을 시키더라도 부모가 하는 일을 전체적으로 바라볼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한다. 예를 들면 고지서따위나 그날 수입을 계산하게 하거나 시장에 같이 가서 물건을 떼온다거나 자재를 사온다던가 하는 것이다. 그럼 이걸 보고 자란 아이는 사업가가 될 소지가 높아진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책임에 더 무게를 두고 있으며 니 인생이 잘못된 것은 어디까지나 니책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해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회의 평등함을 강조하는데, 그 평등한 기회에도 능력차가 생기는 것은 개인의 책임에 불과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말해 걸음마를 할줄 모르는 아이에게 걸음마를 할수있게 누군가가 두손을 맞잡아주고 걸음마 연습을 시켜주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평생 걸음마를 할수없게될지도 모른다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후반부의 내용은 아시아인이 수학을 더 잘하는 문화적 요인에 대해 살펴보고 있고,
이런 아시아적 요소-근면성실하게 16시간 공부하고 8시간 자는.
가 적용되는 학교-키프 라는 곳의 생활을 조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모두에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다면 빌게이츠같은 인재가 수백명 수만명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지었던거 같다.(이건 좀 아닌듯. 경쟁이라는 요소때문에.)

근데 우리나라도 학생들한테 한 16시간쯤 교육을 시키는거같던데 우리나라는 20대 백수가 60만명을 넘어섰쟎아?
그건 교육이 잘못되어서일까, 아니면 우리나라 학생들 근성이 거지같아서일까?

나는 일단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한표.

가끔은 이런 변신합체로봇물을 생각하기도 한다.


명령어가 음성인식 시스템으로 전송되는데, 시스템이 구려서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명령어가 전송이 안된다는 것.


그래서, 변신을 할때에도, 변! 신! 하고 큰소리로 말해야하고,

합체를 할때에도, 합체하고자 하는 형태에 따라서 각각 다른 명령을 내려야하는 경우도 있을거다.

예를 들면 로봇들이 합체를 할때에 모두 합체해서 거대한 비행선이 된다면, 뭐 합체 아크!첼린져!
아니면 아크! 솔져!

세븐체인져같은 경우라면 변신할때마다 변신하는 형태에 각각 다른 이름을 불려주어야할텐데 이건 좀 번거로울듯.

그러다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적들이 시시때때로 변신행위나 합체행위를 방해해서 제대로된 전투행동이 불가능해지고
그런 적들의 행동에 약이 오른 주인공이 맨몸으로 적 기체를 박살내는것.


아파트 크기만한 검을 휘둘러서 아파트 크기만한 적기체를 일도양단해버리는 것도 참 볼만하다 하겠다. 맨몸으로 말이다.

그러면 시청자는 화면을 보며 이렇게 말하겠지.

바보야, 합체를 하지말고 차라리 맨몸으로 싸우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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